본문 바로가기

한잡부의 겐세이

[현대판 사무라이]라는 원전 특공대를 보는 한잡부의 시각

자연의 거대한 힘에 인간의 미약한 머리질이 확실히 얻어 걸려 아작난 사건이 일본의 원전사태가 아닐까 싶다.

과학문명의 발전된 기술에 기댄 자연에 대한 인간의 도전은 이번 일을 계기로 스스로의 미약함을 되돌아보게 하는 사건이 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진보된 문명사회에서의 자연에 대한 도전이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더하면 더해지지... 하지만 그 접근에서 조금 더 조심스럽고 조금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안전”이라는 선결 명제를 확고하게 확립하기 위하여 말이다.

여하튼 ...

폭발한 원전에서 처음부터 지금(마지막)까지 사투를 벌였고 벌이고 있는 50여인의 사람들은 분명 이 시대의 영웅이다.

그런데 ...

스스로 자원했다던 마지막 ‘마지막 사무라이’의 속 모습이 처연함으로 묻어나고 있다.

태평양 전쟁에서 제국주의 일본이 보여주었던 신풍(神風)의 모습처럼 국가 수호라는 명제를 주고 힘없는 약한 사람을 밀어 넣은 억지스러움 말이다.

50인의 결사대 중 5명이 이미 순직했으며 22명이 부상, 2명이 실종됐다.

그들은 일당 12만원의 처자식 없는 비정규직 노동자이거나 계약직 직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역시나 일본의 한계이자 국가와 다수의 이익을 먼저시 한다는 생각의 한계점일까...

2차 대전 전체를 승리로 이끌었던 가장 강력한 힘은 진정한 영국인이라 불리는 한갑부가 존경하는 불독 처칠수상의 힘이었고 그 힘의 원천은 그의 연설에 있었다.

독일 공군에 영국 본토가 유린당하는 현실에서 국가를 위해 목숨을 희생했던 20대의 어린 영국 공군 조종사들에게 처칠은 이런 위대한 문장을 남겼다.

“인류 분쟁의 역사상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적은 사람들에게 의존한 적은 없었다.”

그리고 부상당하고 전사한 어린 그들(병사들)에게 처칠은 경외적 존경을 표했었다.

반세기 시간의 흐름이 지난 오늘...

거의 흡사한 위치에서 개인의 생명과 목숨을 공공이라는 전제를 깔고 국가가 요구 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모습은 그때나처럼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역사의 그때처럼 그들은 힘없는 이들을 죽음의 방패로 먼저 세운 것 같다.

뉴스속의 기사에서 일당 12만원짜리 비정규직 노동자의 희생이 눈에 보이는 현장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 귀족의 의무)라는 지도층의 지도력에 대한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런 일이 한국에서 벌어진다면 생각하건데 거의 동일하지 않을까 싶다.

조금씩 수습의 국면을 찾아가는 오늘...

일본은 50명의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가미가제 특공대’ ‘마지막 사무라이’의 어줍잖은 영웅 칭호보다 죽음을 앞두고 있을지 모를 그들 모두에게 최선의 예우를 먼저 생각하기를 빈다. 사망자의 존엄을 높이 세우고 피폭자를 위한 충분한 구제와 치료를 대비하는 것이 목숨을 빛진 자들의 자세일 것이다.

처연한 원전특공대의 모습에서 힘없는 노동자의 슬픔을 느끼며 불독의 문장에 빛댄 문장 하나를 적어본다.

“인류 사고의 역사상 이토록 높고 대단한 사람들이 이토록 힘없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목숨을 빛진 적은 없다.”

원전 특공대의 모든 기술자들이 무사생환을 기원한다.